토스카나의 여름에 맛본 특별하고 기억이 따쓰한 샐러드가 있어요. 바로 판차넬라, 이탈리아 사람들이 남은 빵으로 만들어 먹는 아주 특이한 샐러드죠. 처음에는 ‘말라버린 빵으로 샐러드를 어떻게?’ 싶지만, 한입 먹는 순간 그 생각은 사라져요. 빵을 토마토즙과 올리브 오일로 촉촉하게 적시고, 바질 향이 퍼지면, 마치 오래전 토스카나에서 먹었던 기억이 난달까요? 남은 빵이 추억이 되는 순간, 그 따뜻한 풍경을 여러분의 식탁에서도 꼭 한번 만나보세요. 오늘은 굳어버린 빵으로 만들어낸 토스카나의 판차넬라를 소개하고, 이탈리아의 남은 음식으로 만드는 지역음식도 알려드릴게요.
마른 빵을 요리한다는 것이 판차넬라의 시작
주말 늦은 오후, 부엌에 며칠 전 먹다 남은 바게트 한 조각이 딱딱하게 굳어 있더군요. 버려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문득 이탈리아에서 먹었던 샐러드 한 그릇이 떠올랐어요. 이름도 정겨운 판차넬라! 처음 들었을 땐 이름이 귀엽다고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남은 빵을 절대 헛되이 보내지 않는 토스카나 사람들의 삶의 태도에서 시작된 음식이더라고요. 판차넬라는 말라버린 빵에 신선한 토마토, 오이, 바질을 섞고 올리브오일과 식초로 버무려 만든 샐러드예요. 재료만 보면 특별할 게 없어 보여도, 그 안엔 꽤나 깊은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요즘처럼 모든 게 풍족한 시대에는 상상이 잘 안 가지만, 옛날 이탈리아 농가에선 남은 음식 하나도 귀했거든요. 특히 토스카나 지방은 날씨가 건조해서 빵이 금세 말라버렸는데, 그걸 그냥 버리는 대신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맛을 불어넣은 거죠. 사실 우리네도 비슷한 정서를 가지고 있잖아요. 밥에 물 말아먹거나, 쉬어버린 김치를 송송 썰어 부침개를 부치는 마음처럼요. 그런 점에서 판차넬라는 어쩌면 지구 반대편의 ‘엄마 밥상’ 같은 존재예요. 투박하고, 단순하지만 이상하게 위로가 되는 그런 음식이죠. 그리고 말라버린 빵을 다시 요리로 살려낸다는 건 단순히 '절약'을 넘어서 ‘기억’을 살리는 일이기도 해요. 저는 토스타나의 친구 결혼식에서 판차넬라를 처음 먹던 그날의 햇살과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떠오르거든요. 그러니까 이 샐러드는 그냥 음식이 아니라, 풍경이자 감정이고, 시간을 담은 요리예요. 요즘처럼 바쁜 일상 속에서 따뜻한 유럽의 어느 여름을 떠올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반은 성공한 요리가 아닐까요? 딱딱해진 빵 한 조각이 낭만이 될 수 있다는 것, 이토록 소박한 재료로도 충분히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는 걸 판차넬라는 말없이 보여줍니다.
이탈리아 북부에서 찾은 또 다른 남은 음식의 마법
한겨울 밀라노에서 친구가 일하던 작은 식당에서 항상 궁금했던 “Cassoela”라는 요리를 처음 먹어봤어요. 그때 친구가 “우리 엄마가 겨울마다 해주던 요리야”라며 눈을 반짝이며 설명해 주던 그 요리. 그날의 기억이 잊히질 않아서 가끔 비슷하게 만들어봤습니다. 카쏘엘라는 원래 돼지 도살 후 남은 부위를 활용해 만든 요리예요. 껍데기, 갈비, 족발 같은 부위와 양배추, 당근, 셀러리를 오랜 시간 푹 끓여내면, 고기와 채소의 맛이 어우러지며 깊고 진한 국물이 완성돼요. 마치 우리나라 감자탕처럼 서민적인 풍미가 느껴지죠. 저는 갈비와 냉장고에 있던 묵은 양배추로 끓여봤는데, 생각보다 간단하고 정겨운 맛이 나더라고요. 오래 끓일수록 맛이 깊어지니, 저녁에 한 냄비 끓여두면 다음 날 점심은 걱정 없답니다. 베네토 지방에선 남은 폴렌타를 다시 구워 먹는 문화도 있어요. 처음에는 옥수수가루로 만든 음식이 왜 이렇게 인기인가 싶었지만, 오히려 구워낸 폴렌타는 겉이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워서 치즈나 햄과 함께 먹으면 간단한 브런치가 되더라고요. 저는 냉동실에 있던 콘그리츠로 폴렌타를 만들어봤고, 남은 건 오븐에 살짝 구워 고르곤졸라 치즈와 먹었어요. 정말 맛있어서 “왜 지금까지 안 해봤을까?” 싶더군요. 피에몬테에는 크리스마스 다음 날 아침 식탁 위에 자주 올라오는 파네토네 푸딩이 있어요. 달달한 파네토네를 두툼하게 썰어 우유, 달걀, 설탕, 그리고 레몬 제스트를 섞은 액체에 적신 후 오븐에 구우면 되는데,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디저트가 완성돼요. 저는 파네토네 대신 식빵으로 만들어봤는데, 아이들이 너무 좋아해서 남은 빵이 생기면 일부러 이걸 만들게 되더라고요. 북부 이탈리아 사람들은 남은 재료를 그냥 먹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따뜻한 지혜를 통해 요리로 승화시켜요. 여러분의 식탁에도 그런 마음이 깃든다면, 남은 음식조차도 특별한 추억이 되지 않을까요?
남부 이탈리아 식탁에 낭비는 없고 남기는 미학이 있다
남부 이탈리아 사람도 음식도 낭비하지 않고, 모든 것을 소중하게 나누죠. 남김조차도 예술로 바꾸는 그들의 식탁은 어느 한 끼도 가볍게 지나치지 않습니다. 제가 처음 ‘파스타 알 포르노(pasta al forno)’를 접한 것도 그곳에서였어요. 전날 먹고 남은 파스타를 오븐에 치즈와 토마토소스를 곁들여 다시 구워낸 음식인데, 말 그대로 ‘오븐에 넣은 파스타’입니다. 냄비째 데우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맛이에요.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워, 한 입만 먹어도 뭔가 특별한 느낌이 들죠. 저도 어느 날 남은 링귀네가 애매하게 남아서 모차렐라 치즈를 더해 즉석에서 만들어 봤는데요. 이걸 왜 진작 몰랐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평범한 파스타가 오븐 한 번 거치면서 식탁 위 분위기까지 바뀌더라고요. 또 하나 감동받았던 건 ‘카포나타(caponata)’입니다. 가지, 토마토, 셀러리, 양파 등을 설탕과 식초로 졸여 만든 시칠리아식 채소 스튜인데, 사실은 모두 남은 채소의 향연이죠. 냉장고에 남아있는 가지 세 개와 방울토마토 몇 알, 애매한 양의 양파 반 개를 꺼내서 만들어봤는데요. 마지막에 살짝 올린 잣이 포인트였습니다. 반찬처럼 먹어도 좋고, 차갑게 해서 바게트에 얹어 먹으면 훌륭한 안주가 되죠. 그리고 이건 조금 놀라운 이야기인데, ‘폴포 알라 루치아나(polpo alla Luciana)’라는 문어 요리도 사실은 냉장고 정리용이었다고 해요. 이탈리아 나폴리 근처 산타 루치아 마을의 어부들이 잡은 문어와 감자, 그리고 집에 있는 토마토소스로 만든 음식인데, 지금은 고급 요리처럼 여겨지죠. 저도 생물 문어를 구하기 어려워 냉동 자숙 문어로 시도해 봤는데, 약불에 천천히 졸이니 국물이 정말 깊고 진했습니다. 이렇게 남부 이탈리아 사람들은 풍족함보다 마음과 정성으로 요리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남김’은 우리가 생각하는 버려지는 음식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맛의 시작이죠. 한 접시의 요리가 추억이 되고, 남은 재료가 다음 식탁의 주인공이 되는 이 흐름이야말로, 남부 이탈리아가 오래도록 사랑받는 이유 아닐까요?
남은 감정까지 다정하게 섞은 샐러드 한 그릇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어제저녁 반쯤 쓰고 남은 방울토마토, 시들기 시작한 로메인 한 줌, 냉장칸 구석에 남은 올리브 몇 알이 눈에 들어오죠. 전에는 그냥 지나쳤을 텐데, 어느 날 문득 냉장고에서 모두 꺼냈죠. 물로 야채를 헹구고, 가장자리가 마른 토마토는 반으로 잘라 씨를 털어내고, 로메인은 손으로 쫙쫙 찢어내니 묘하게 스트레스도 풀리더라고요. 샐러드는 요란하지 않은 요리예요.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만들어도 괜찮다는 뜻은 아니죠. 저는 이탈리아식 샐러드, 특히 인살라타 미스타(Insalata Mista)처럼 간단한 구성에 정성을 담는 걸 좋아해요. 신선한 채소 몇 가지, 치즈 조금, 올리브오일만 있어도 충분하죠. 이날은 남은 재료에다가 냉장고에서 잊히고 있던 리코타 치즈를 얹고, 마침 집에 있던 호두를 살짝 부숴 올렸어요. 바삭한 식감 하나 더 들어가니 입안이 심심하지 않더라고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소스인데, 저는 올리브오일 3스푼에 발사믹 식초 1스푼, 소금 한 꼬집, 그리고 아주 약간의 디종 머스터드를 넣어 섞어요. 이 소스를 젓가락으로 휘휘 저어 샐러드 위에 조심스레 뿌릴 때면, 뭔가 흐트러졌던 마음이 차분히 정리되는 느낌이 듭니다. 그날의 속상함도, 조금 과했던 말투도, 함께 묻어가게 되는 것 같거든요.
결론은 음식이 남는다고 나쁜 건 아니다
샐러드는 남은 재료로도 얼마든지 새로워질 수 있는 요리예요. 무엇보다, 그날그날 내 마음의 상태를 그대로 담을 수 있는 음식이라는 게 좋아요. 제가 만든 이 샐러드는 사실 대단한 요리는 아니었어요. 그런데 한 입 먹고 나니 이상하게 마음이 부드러워졌어요. 이렇게 굳어버린 빵으로 만든 토스카나의 판차넬라에 대해 이야기했고, 남은 음식으로 만드는 지역음식도 함께 알아봤어요. 꼭 음식을 잘해야 좋은 요리가 되는 게 아니라, 그 안에 남겨진 감정도 잘 버무려졌을 때 비로소 ‘완성’된 요리가 되는 것이죠. 혹시 오늘 마음속에 조금 남아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샐러드 한 그릇 어때요? 버무리는 동안 내 마음도 천천히 정돈될지 몰라요. 요리는 결국 마음으로 하는 일이니까요.